[스크랩] 살고싶어 왔습네다 탈북 미혼모의 절규
"안녕 하십....."
까만 고무줄로 머리를 지끈 묶고 눈에 뛰게 부른 배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사랑뜰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오 ㅇㅇ 씨와의 첫 만남 이었습니다.
오 ㅇㅇ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입니다.
회사원인 부친과 주부인 모친사이에서 4남매중 막내로 유년기를 그럭저럭 보냈으나, 부친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가시밭길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노점에서 국수를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지만 결혼은 없는 형편에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동거로 신혼을 시작하게되었고 사랑하는 남편 닮은 예쁜 딸을 출산하였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남편은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어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지병으로 사망하게 되어 부득이 하게 친정의 도움으로 홀로 딸을 양육해야만 했습니다.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 어린 딸에게 먹일 양식조차 구할 수 없어지고 그나마 도움을 주고있던 모친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노점에서 일하며 고픈배를 채웠고 끼니를 굶는 시간은 늘어가고 희망없는 앞날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암암리에 거래되는 탈북 브로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고 지난 해 연말 사랑하는 딸과 모친을 남겨두고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하였습니다.
"엄마가 돈 벌어 맛난 음식과 예쁜 옷도 사주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있는 딸을 남겨두고 훗날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며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탈북을 돕던 생면부지의 브로커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고, 생사의 기로에선 상황이라 사고 처리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겨우 탈북에 성공하고 중국을 거쳐 제 3국을 통하여 한국에 입국 할 수 있었습니다.
제 3국 피난민 수용소에서 몸의 변화를 인식하고 수용소 직원의 도움으로 임신시약을 통해 임신을 확인했지만 의료기관의 진료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임신이 진행 되었고,
한국에 입국했을땐 합법적인 중절수술 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 임신을 진행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원 직원의 권유로 아동의 입양에 대해 고려하면서 미혼모자시설 입소에 대해 알아 보던 중 사랑뜰을 알게 되어 입소를 하게되었습니다.
입소초기엔 자신의 말투가 친구들과 달라 거의 침묵하고 있었고 자신의 환경이 알려질까 걱정하며 힘든 단체생활을 하였지만, 지속적인 상담과 입소자들과 함께 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닫혀 있던 마음의 벽들이 조금씩 낮아지게 되었고 , 조금씩 여유를 찾아 아동의 문제와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해보기도 하며 북한에두고 온 딸과 모친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지난 8월 중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오 ㅇㅇ 씨는 자연분만을 통하여 건강한 여아를 출산하였습니다.
오 ㅁㅁ(아동 이름)를 가슴에 안는 순간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분만실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지켜보던 의료진 선생님들과 담당 선생님들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슴앓이를하며 애태우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퇴원 후 사랑뜰에서 아동을 양육하며 입양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힘들지만, ㅁㅁ(아동)이를 도저희 보낼 수 없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딸을 생각하며 어렵지만 자신의 손으로 최선을 다해 양육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한민국 ~!!!!
이제 나의 조국이 된 이나라에서 서툴지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려 합니다.
자신의 생명인 ㅁㅁ(아동)이와 또 먼 훗날 기쁘게 만날 큰 딸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준비를하며 기다리려 합니다.
오 ㅇㅇ씨의 삶이 더 이상의 가시밭길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뜻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분신인 ㅁㅁ(아동)이와의 생활에 많은 응원을 보내주십시오.
문화적차이를 잘 극복하고 ㅁㅁ(아동)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새 삶의 터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시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