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의 왕
헤로데의 아버지는 이도메네아의 안티파트로스, 어머니는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의 공주 키프로스로 헤로데는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며, 그의 가문은 이도메네아의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이었다. 이도메네아(이두매, 에돔) 는 유대 남쪽의 지역 이며, 마카베오 가문의 요한 히르카우스에 이도메네아 지방을 이두매(개역한글판, 역개정판, 표준새번역)또는 에돔 (공동번역성서)으로 번역했는데
이두메아(Idumea, NIV와 NASB), 이두마에아(Idumaea, KJV)라고 한다. 따라서 헤로데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에서 태어난 외국인이었고, 이는 유대 사람들이 헤로데를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유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솔로몬 왕 시대의 영광이 담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고, 로마 군인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교 우대정책과 수도시설 개선사업을 실시했다. [3]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나 카시우스와 같은 로마의 유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기원전 47년 유대의 지방행정관 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아들 헤로데를 갈릴래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3년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그는 암살자를 처형하고 돌아와 당시 명목상 유대의 왕가였던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의 청혼을 받았다. 당시 마리암은 아직 10대였으나 헤로데는 첫번째 부인인 도리스와 3살 난 아들
안티파트로스 (헤로데의 아버지의 이름과 같음) 를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유대교 제사장 (사제) 가문과 결합하였다. 유대를 침공하자 그는 로마로 도망쳤고 거기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의 칭호를 받았고 기원전 37년 유대로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이기고 집권한 이래 34년간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내전 당시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했으나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로도스 섬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왕”의 지위를 다시 한 번 인정받았다.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는 한편 또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간통죄로 처형했는데, 여기에 마리암의 동생인 살로메와 친어머니인 알렉산드라가 개입하였다고 한다. 마리암의 처형 이후 알렉산드라는 헤로데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여왕으로 선포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헤로데가 그녀를 재판없이 죽였다. 치세와 업적묘사된 대로 헤로데를 잔인하고 음흉한 광기어린 군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힘쓴 선견적인 통치자이기도 했다. 기원전 25년에는 유대 지방에 대가뭄으로 기근이 나자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수입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헤로데는 자기 영토에 일종의 건축붐을 일으키고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다.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을 건설하고 국경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새로이 정비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배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했던 아스팔트를 사해에서 추출하여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배분하여 독점 구리 광산을 임대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에 그가 건설한 도시로 유명한 것은 카이사레아 마르티아와 그 항구, 그리고 옛 사마리아의 유적 위에 세워져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세바스테인데 카이사레아는 나중에 유대가 로마의 직할령이 된 후 그 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유대인이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는데 이것을 헤로데의 성전 또는 그냥 두번째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로데는 수많은 건물을 지었고, 로마의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짓는 등 유대 전통과 맞지 않는 이교적인 일을 많이 했다.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주관자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대 지역에서는 헤로데에 대한 반감을 가진 유대인이 많았는데 메시아가 도래하면 헤로데의 통치가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라사이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그는 그리스-로마인들이나 유대 지역 외의 유대인에게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아나톨리아와 크레네에 사는 유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죽음과 후계 문제 [편집]헤로데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처형으로 얼룩졌다. 그는 여섯 번 결혼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을 죽였고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장모까지도 죽여 버렸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했다. 후계자 문제를 두고 수차례 유언을 번복하기도 하고 결국,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재판에 올려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하에 처형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누누어 주었는데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에게는 자신의 전 영토를 주었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갈릴래아)와 페레아를, 헤로데 빌립보 1세에게는 골란 지역과 베타니아, 트라코니티스를 각각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유언은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결국 세 아들 모두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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